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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림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신도림동은 조선시대말 까지는 경기도시흥군 상북면(上北面)의 도야미리(道也味里) · 원지목리(遠芝牧里) 등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경기도 내 각면의 명칭과 구역을 다시정함에 따라, 이 지역은 경기도 시흥군 북면 도림리(道林里)가 되었다.이어 1936년 4월 1일에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경기도 시흥군의영등포읍과 북면 · 동면 지역의 일부가 경성부에 편입될 때 도림리 중상도천(上道川) 우안(右岸) 지역만 경성부에 편입되어 도림정(道林町)이되고 상도천 좌안(左岸) 지역은 이에서 제외되어 경기도 시흥군 동면도림리로 편제되었다. 광복 후 1949년 8월 13일에 대통령령 제159호에따라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이 확장될 때 이 도림리는 영등포구에편입되었는데 1936년에 먼저 편입된 도림리가 있는 까닭에 신도림리라하였다.

 

그러나 동리명은 옛날 그대로 "리(里)"로 칭해오다가 1950년3월 15일서울특별시조례 제10호 「서울특별시 동리 명칭 중 개정의건」이 공포되어 모두 "동(洞)"으로 고쳐져 신도림동이 되었다. 1975년10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979호로 동명칭 및 구역을 확정하고, 동981호에 의해 동장 정원 및 명칭과 관할 구역을 변경하였는데, 이 때신도림동은 신도림1동과 2동으로 분동되었다. 그리고 1977년 9월 1일서울특별시조례 제1181호에 의하여 인구 3만명 이상의 동을 분동함에다라 신도림 2동은 대림1동과 2동으로동명이 바뀌면서 분동되었다. 대림동(大林洞)이란 명칭은 신대방동(新大方洞)의 대(大)자와신도림동(新道林洞)의 림(林)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따라서신도림1동은 원래의 이름대로 신도림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후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영등포구로부터 구로구가분리 신설됨에 따라 구로구에 속하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러므로조선시대의 도림리(道林里)는 구로구의 신도림동과 영등포구의 도림동,대림동으로 3분되어 그중 신도림동만이 구로구에 속하게 되었고 나머지지역은 영등포구에 속하게 된 것이다.

 

신도림동이란 동명은 도림동에서 새로 갈라져 나왔으므로 불리어진이름이다. 도림동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가 전해 오고 있다.하나는 이 마을 일대의 들판이 억새풀 종류의 새나무가 많았으며, 특히길옆에 삿자리 종류의 풀이 숲을 이룬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라는것이다. 또 하나는 산의 형국이 마을 뒤로 산처럼 둘러 싸고 있어 이마을이 국도에서 돌아앉아 있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인 "도야미리(道也味里)"가 도림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신도림동은 60년전만 하더라도 6가구만이 거주했던 한촌이었다.그런데 1934년 무렵 경인도로가 개통되면서 전일의 도림동 지역이었던문래동(文來洞) 철거 지역 주민 30여 가구의 이전으로 주민 수가늘어났으나 이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광복 이전만 하여도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50여 세대만이 거주하였다. 일제 때 경인로도로변의 동아건설 산업주식회사 장비사업소(지금의 신도림동 432번지)자리에 류정(柳町) 염색공장이 세워지면서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하자 신도림동 이름 대신에 류정(柳町) 마을로 더 잘 알려졌다. 류정마을하면인근에서는 인심이 좋은 마을로 알려지는 한편 이곳의 참외는 특히유명했다.

 

구로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구로구의 중심동인 구로동은 현재 구로본동과 구로1동∼5동의 6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명과 관련 옛날이곳에는 9명의 장수한 노인이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조선 영조(英祖) 시대까지는 경기도 금천현(衿川縣) 상북면(上北面)구로(九老)1 · 2리였으나, 1795년(正祖 19년) 衿川縣(금천현)이시흥현(始興顯)으로 개칭됨에 따라 시흥군(始興郡) 상북면(上北面)구로리(九老里)가 되었다. 1895년(高宗 33년) 5월 26일 전문 6조의 칙령98호를 발표하여 지방제도의 대개혁이 단행되었는데, 이 때 시흥현은시흥군으로 바뀌고 안산 · 과천군과 함께 인천부(仁川府)에 속하게되었다. 이후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제111호에의해 경기도 각 면의 명칭과 구역을 새로 정함에 따라, 이 지역은경기도 시흥군 북면(北面) 구로리가 되었다. 이어 1936년 4월 1일에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거해 경기도 시흥군의 영등포읍과 북면 · 동면지역의 일부가 경성부에 편입될 때 구로리 지역은 이에서 제외되어경기도 시흥군 동면(東面) 구로리가 되었다.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9호에 따라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이대폭 확장되어 경기도 시흥군 동면의 구로리 · 도림리 · 번대방리 및경기도 고양군 수인면 · 둑도면 · 은평면의 42개 동리가 서울시에편입되었는데, 이 중 시흥군 동면 구로리 · 도림리 · 번대방리 등 3개동리는 영등포구에서 직접 관할하였다. 그러나 동리명은 옛날 그대로 "리(里)"로 칭해오다가 1950년 3월 15일서울특별시조례 제10호「서울특별시 동리 명칭 중 개정의 건」이 공포되어 모두 "동(洞)"으로고쳐졌다.

 

1970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 「동장정원 및 명칭과관할구역 변경조례」로 행정동이조정되어 구로동은 구로제1동, 구로제2동, 구로제3동의 3개동으로 분동(分洞)되었다. 1975년 10월 1일서울특별시조례 제 979호에 의해 동명칭 및 구역확정이 있었고,동981조에 의해 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구역의 변경이 있었는데, 이 때구로4동이 신설되었다. 그리고 1977년 9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제1181호로 인구 3만명 이상의 동을 분동함에 따라 구로 1동을 구로1동과 5동으로 구로4동을 구로4동과 6동으로 각각 분동하였다. 그리고 3년 후인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구로동공업단지를 중심으로 발전 계획이 수립되어 영등포구로부터 구로구가분리 신설됨에 따라 구로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8년 7월 1일 서울특별시 구로구 조례 제158호로 구로본동이 신설되어 7개의행정동으로 나뉘어 오늘에 이른다.

 

 

가리봉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가리봉동은 조선말까지는 경기도 시흥군동면(東面) 가리산리(加里山里)였다가 가리봉리(加里峰里)로 바뀌었다. 가리산리에서 가리봉리로 명칭이 바뀐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12년에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시흥군동면 가리봉리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가리봉리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될 때까지 큰 변동이 없었으며,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면서 가리봉동(加里峰洞)의 가(加)와 독산동(禿山洞)의산(山)자를 따서 가산동(加山洞)이라 명명하였다. 당시 새로 편입된 지역은 면적이 광활하였기 때문에 서울시에서는 서울특별시조례제276호로 이들 지역은 관할하는 10개의 출장소를 신설하였는데 가산동은 영등포구의 관악출장소가 관할하였다. 그러나 1969년 1월 1일서울특별시조례 제491호로 10개 출장소 중망우 · 오류 · 양동 · 관악출장소가 폐지됨에 따라 가산동은 영등포구의 직할동이 되었다.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6호에 의하여 다시 가리봉동과 독산동으로 분동되었는데, 당시 가리봉동의 면적은 3.36㎢였으며3,673가구에 인구는 33,045명이었다. 1977년 9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제1185호로 인구 2만 5천명 이상의 동을 분동하였는데, 이 때 가리봉동은 가리봉1동과 2동으로 분동되었다. 이후 1980년 4월 1일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영등포구로부터 구로구가 분리 신설됨에 따라구로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1980년 7월 1일서울특별시조례1413호「동사무소 설치조례」에 의해 가리봉1동이 가리봉1동과 가리봉3동으로 분동되었다.

 

1995년 3월 1일 금천구가 신설되어 구로구에서 분구(分區)됨으로인해 가리봉동의 일부와 독산동, 시흥동은 금천구가 되었다. 이 때금천구와 구로구는 남부순환도로를 경계로 하였는데, 그 결과가리봉1동의 일부와 가리봉 2동의 대부분 그리고 3동의 전부가 금천구로 편입되었다. 가리봉1동의 면적은 0.29㎢에서 0.255㎢로 0.035㎢가줄어든데 그쳤으나, 가리봉2동은 2.03㎢에서 0.147㎢로 면적이 10분의 1이하로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남부순환도로 남쪽의 공단지역이 모두금천구로 편입되어 면적으로나 인구로나 구로구 내에서 가장 영세한 동이 되고 말았다.

 

가리봉동의 동명의 유래는 두 가지로 생각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이지역 주위의 작은 봉우리가 이어져 마을이 되었다고 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 연원을 고을과 같은 의미를 갖는 "갈" 혹은 "가리"에서 찾고 있다. "가리"는 갈라졌다는 뜻에서 유래하는데, 구로구의 전체적인 땅 모양이 바지 가랭이처럼 갈라져 있는 것과 연관된 명칭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고척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고척동(高尺洞)은 조선 영조 때 부평도호부고좌리였다가 1895년 5월 26일 인천부 부평군 수탄면 고척리로바뀌었고, 1896년 8월 4일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 고척리가 되었으며,1914년 3월 1일 경기도 부평군 계남면 고척리가 되었다가, 1941년10월에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고척리가 되었다. 1962년 11월 21일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제정 공포한 법률 제1172호「서울특별시 · 도 · 군 · 구의 행전구역변경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1963년 1월 1일을 기해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이 대폭 확장되어시흥군 · 김포군 · 부천군의 많은 지역이 영등포구로 편입되었다.

 

이 때소사읍의 7개리(고척 · 개봉 · 오류 · 천왕 · 궁 · 항 · 온수)와 오정면의2개리(오곡 · 오쇠)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는데, 이 때 고척리도부천군 소사읍의 다른 6개 리와 함께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서울특별시는 이들 편입지구를 관할하기 위하여 1963년 1월 새로 10개의출장소를 설치하였는데, 그 중 오류출장소는오류리 · 고척리 · 개봉리 · 궁리 · 온수리 · 천왕리 · 항리 등을 관할하였다.1968년 1월 1일 오류출장소의 폐지로 영등포구의 직할동이 되었다가,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영등포구 관할구역?? · 개봉동 · 오류동 · 궁동 · 온수동 · 천왕동 · 항동일원과 신도림동 일부를 관할구역으로 구로구가 분리 신설되고 구간경계 조정이 있게 되었다. 이 때 고척동은 구로구에 속하여 현재에이른다.

 

이후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각 동 사이에 인구 및 관할구역 등이현저한 차이를 나타내게 되자 1970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구역 변경조례」에 의해 동의 관할 구역을조정하여 행정동의 균형 및 능률을 제고하였다. 이 대에 확정된고척동의 동세는 면적 3.77㎢에 가구수 3,775호 인구 18,184명으로 16통153개 반으로 조직되었다. 1978년 10월 10일 서울특별시조례 제1286호에의해 동명칭 및 행정구역획정이 있게 되고, 1287호에의한 동 통합 및분동으로 서울특별시는 종래 369개동에서 14개동이 증가하고 1개동이폐동됨으로써 382개동이 되었다.

 

이 때에 분동대상은 인구 3만5천명이상인 동과, 그 미만의 동 가운데 아파트의 입주 등으로 인구 격증이확실한 곳이었다. 고척동은 이 때 고척1동과 고척2동으로 분동되었는데,그 조정을 살펴보면 고척1동은 인구 18,110명이었고 고척2동은18,561명으로 그 경계는 자연하천과 소방도로를 기준으로 하였다.

 

고척동의 동명의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이동네의 한 자연 마을인 고좌리(高坐里) 즉 높은 곳에 생긴 마을이라는데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이 동네는 경기도부천 · 안양 · 강화 사람들이 서울지역 사람들과 안양천을 경계로 하여생필품 및 농산물을 교환하여 오던 곳으로서 당시 계량기가 없어 교환측정이 곤란하자 긴 자(高尺)로 재서 서로 교환 측정하던 것을 고척이라칭한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오류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오류동은 조선영조 때 부평도호부 오류리로처음 그 이름이 보인다. 1895년 5월 26일에 인천부 부평군 수탄면오류리가 되었다가, 1896년 8월 4일 부평군이 인천부에서 벗어나경기도에 속하게 됨에 따라 자연히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 오류리가되었다. 그 뒤 1914년 3월 1일에 부평군의 관내 행정구역에 면이설치됨에 따라 경기도 부평군 게남면 오류리가 되었다가, 1931년 4월1일에는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오류리로 그 소속이 바뀌었고, 941년10월 1일에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오류리가 되었다.

 

해방 후인 1963년 1월 1일에 법률 제1172호(1962년 11월 21일 공포)에의한 서울특별시 행정구역확장에 따라 시흥군 · 김포군 · 부천군의 12개면90개리를 서울특별시로 편입하였는데, 이 때 오류동도 소사읍 관내6개동과 함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어 서울시의 일부가 되었다.이 때 영등포구에는 김포군 양동면 · 양서면, 부천군 오정면 · 소사읍,시흥군 신동면 · 동면 등 3개군에 걸쳐 많은 지역이 편입되었다.

 

따라서 서울시에서는 이렇게 넓은 신편입지구를 관할하기 위하여 1962년 12월28일자로 공포된 서울특별시 조례 제276호에 의하여 영등포구에신동(新洞) · 관악(冠岳) · 양동(楊東) · 양서(良書) · 오류(梧柳)출장소의5개 출장소를 신설하였다. 오류동은고척동 · 개봉동 · 궁동 · 천왕동 · 항동 · 온수동과 함께 오류출장소관할하에 있었는데, 1968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491조에 의하여망우 · 오류 · 양동 관악출장소가 폐지됨에 따라 오류동은 영등포구의직할로 편입되었다. 이어서 1980년 4월 1일 영등포구의 인구 증가로인해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거하여 영등포구의 남부지역을 분할하여구로구를 신설함에 따라 오류동은 구로구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류동의 행정동의 변천은 1963년 1월에 오류동이 서울시에편입되면서 서울특별시 조례 제275조에 의하여 오류동사무소를설치하였다. 그 후 서울시는 1970년 5월 18일 동행정의 불균형을조정하고자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 「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구역변경 조례」에 의해 56개동을 분할하여 113개동으로 만들고, 119개 동을통합하여 65개동으로 줄였는데, 오류동은 동정(洞政) 여건이 어려운수궁동(온수 · 궁 · 항동)을 통합하여 오류동사무소에서 행정을 담당하게되었다. 당시 오류동의 면적은 9.28㎢에 인구는 29,230명, 가구 수는5,823호로 30개 통과 267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어 1975년 10월1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981조에 의해 동장 정원 및 명칭과 관할 구역의변경이 있었는데, 이 때 오류동은 경인선 철도를 경계로 오류제1동과오류제2동으로 분동(分洞)되었다. 분동된 오류제1동은 3.66㎢의 면적에3,987가구 18,921명이 속했는데, 관할 구역은 오류동 242번지를기점으로 141, 40, 65, 77∼79번지에 연하는 이북 지역과 궁동 및온수동 일원이었다. 그리고 오류제2동은 5.62㎢의 면적에 2,973가구16,471명이 속하게 되었는데 관할 구역은 천왕동, 항동 일원과 오류동중 오류제1동의 관할 구역을 제외한 부분이었다.

 

그 후 1980년 4월 1일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구(分區)됨으로 인해오류동은 구로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하여1988년 7월 1일에 오류제1동에서 온수동과 궁동을 분리하여수궁동(온수동 · 궁동)으로 분동하였다.

 

천왕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천왕동(天旺洞)은 조선 영조 때 부평도호부천왕리였다가 1895년 5월 26일 인천부 부평군 수탄(곡)면 천왕리가되었으며, 1896년 8월 4일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 천왕리가 되었고,1914년 3월 1일에 경기도 부평군 계남면 천왕리가 되었다. 1931년 4월1일에는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천왕리로 되었고, 1941년 10월 1일에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천왕리로 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에 서울특별시영등포구 오류출장소 천왕동으로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이 때 천왕동은항동과 함께 오류동사무소에서 행정을 담당하였다. 그 뒤 1968년에오류출장소가 폐지됨에 따라 천왕동은 영등포구의 직할이 되었으며,1975년? 따라 천왕동은 오류2동사무소에서 행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1980년 대통령령에 의해동작구와 구로구가 신설됨에 따라 천왕동은 구로구의 관할이 되어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왕동이란 명칭은 동네 뒷산이 굴봉이고 굴봉산 골짜기에천왕사(天旺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절 아래 마을이란 뜻에서천왕골 또는 천왕리로 불려진 것이다.

 

 

항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항동(港洞)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 영조 때부평도호부 항리였다가 1895년 5월 26일 인천부 부평군 옥산면 항리가 되었다가, 18996년 8월 4일 경기도 부평군 옥산면 항리가 되었으며, 1914년 3월 1일에 경기도 부평군 계남면 항리가 되었다. 1931년 4월1일에는 경기도 부천군 계남면 항리로 되었고, 1941년 10월 1일에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항리로 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에 서울특별시영등포구 오류출장소 항동으로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이 때에 항동은서울특별시조례 제276호(1962년 12월 28일 공포)에 의해 영등포구오류출장소 관할의 수궁동(水宮洞)사무소에 궁동 · 온수동과 함께편입되었다??해오류출장소를 없앰으로 인해 영등포구의 직할동이 되었다가, 1970년 5월18일에는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 (1970년 5월 5일 공포)에 의해수궁동사무소를 없애고 오류동사무소에서오류동 · 천왕동 · 항동 · 궁동 · 온수동의 행정을 맡았다.

 

1975년 10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981호(1975년 9월 29일 공포)에의해 오류동사무소가 오류1동과 오류2동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항동은오류동 일부 지역과 함께 오류2동사무소에 속하게 되었다. 1980년 4월1일 대통령령 제9630호(1979년 9월 26일 공포)에 의해 영등포구에서구로구가 분리 신설되자 오류2동은 영등포구의 관할을 벗어나 구로구의관할이 되었으며 항동도 자연히 구로구의 지역이 되었다.

 

항동이란 동명의 연원에 대하여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마을의 형태가배 모양이므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마을이름에 "항(航)"이란 글자가 들어 있는 마을은 옛 부평의 땅에 두 곳이있을 뿐인데 경기도부천시 소사동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곳은구로구의 항동이고, 서쪽에 있는 곳은 인천시 북구 부개동에 딸린마을인 항동(港洞)이다. 이 중 인천의 항동은 이곳이 부평군 군내면의관할이 될 때까지는 항동이었다가 나중에 일신동(日新洞)의 한 마을인항동(港洞)으로 바뀌었으며 그후 부개동(富開洞)의 자연부락이 되었다. 따라서 항(港)자가 들어가는 마을은 이곳 구로구의 항동 하나만 남게 된것인데, 옛날이곳 일대가 바다처럼 물이 많을 때 배가 마을에닿았으므로 항동이라 했다는 전설적인 해석도 있다. 천왕동의너부대내와 소래(蕭萊) 쪽의 낮은 곳은 해발 10m 내외이므로 이러한전설적인 해석도 전혀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온수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온수동은 조선 영조 대에 부평도호부온수리였다가, 1895년 5월 26일에 인천부 부평군 수탄(곡)면 온수리가되었으며, 1896년 8월 4일에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 온수리로, 1914년3월 1일에는 경기도 부평군 계남면 온수리가 되었고, 1931년 4월1일에는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온수리가 되었으며, 1941년 10월 1일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온수리, 1963년 1월 1일에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오류출장소 온수동으로 변천되어 왔다. 오류출장소 관할에서는 폐지됨에따라 영등포구의 직할동이 되었다.

 

1970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에 의해 수궁동사무소가폐지되고, 온수동사무소의 관할이 되었으며, 오류동사무소가 1975년 10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제981호에 의해 오류 1동과 오류2동으로 분동될 때 온수동은 오류동일부지역과 궁동과 함께 오류1동사무소의 관할이 되었다. 1980년 4월1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구로구가 영등포구에서 분할 신설됨에따라 자연히 구로구 관할이 되었고, 1988년 7월 1일에 분리하여 다시수궁동을 설치함에 따라 수궁동 사무소의 관할 구역이 되었다.

 

온수동이라는 동명은 온수골에서 유래하였는데 옛날 이 지역 일대에서더운 물이 나왔기 때문에 온수골이라 하였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약300년 전에 물이 나왔다고 하나 이는 막연한 전설인 것 같다. 세종실록에는 온수동의 온천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부평도호부를 현으로 강등했다. 임금께서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들으시고, 조정의 신하를 여러 차례 보내서 찾아 보라고 했으나 그곳아전과 백성들이 숨기고 말을 듣지 않으므로 도호부를 폐하고 현으로강등했다. (『世宗實錄』권83, 世宗 20년 11월 8일)

 

위의 기록으로 보아 피부병으로 일찍이 온양 등지로 온천욕을 다녀와효험을 본 세종임금이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온천할 곳을 찾기위하여지명이 온수(溫水)인 이 지역으로 사람을 보내 온천을 탐색하도록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온천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에대한 문책으로 도호부를 현으로 강등시키고 말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그곳 아전과 백성들이 숨기고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 대목이주목된다. 이에 대해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일단 온천수가 나오면온천욕을 하기 위해 많은 피부병환자들이 몰려들어 주민들에게 불쾌감을주고, 또 넘쳐나온 온천수는 논에 극심한 피해를 주기 때문에 주민들이온천수의 맥을 흙과 돌로 막아 버리고 물구멍이 있다는 사실 조차도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온천에 전 다리 모여들 듯", "온양온천에 헌다리모이 듯" 한다는 속담이 있음으로 보아 의술의 발달이 상대적으로미약했던 과거에는 온천욕이 피부병 치료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고,따라서 온천이 나온다고 하면 많은 피부병환자들이 몰려들게마련이었다. 더군다나 왕이 다녀갈 정도로 소문이 난다면 전국에서 많은환자들이 몰려올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현지의 주민들이이를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 온천수가 나온 것은 세종 대왕대 이전으로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후 온천의 개발은 일제시대일인들이 1920년대에 온천개발사업에 착수하였다는 데서 찾아볼 수있다. 그러나 일인들은 여기 저기 땅을 파면서 많은 경비만 투입한 채수맥을 찾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그 뒤에도 온천에 관한 관심은여전하여 1969년과 1970년에도 온천시추작업을 하였으나 수맥을 찾지못하였다. 1985년에도 새로운 장비로 시추작업을 하였으나 온천수를개발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궁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궁동은 조선 영조 대에 부평도호부 궁리였다가, 1895년 5월 26일에인천부 부평군 수탄(곡)면 궁리가 되었으며, 1896년 8월 4일에 경기도부평군 수탄면 궁리로, 1914년 3월 1일에는 경기도 부평군 계남면궁리가 되었고, 1931년 4월 1일에는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궁리가되었으며, 1941년 10월 1일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궁리, 1963년 1월1일에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오류출장소 궁동으로 서울에 편입되면서동이란 명칭을 갖게 되었다. 오류출장소 관할에서는 온수동, 항동과함께 수궁동사무소에서 행정을 관할하였으나, 1968년 1월 1일오류출장소가 폐지됨에 따라 영등포구의 직할동이 되었다.

 

1970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에 의해 수궁동사무소가폐지되고, 궁동은 천왕동 · 온수동 · 오류동 · 항동과 함께 오류동사무소의관할이 되었으며, 오류동사무소가 1975년 10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제981호에 의해 오류 1동과 오류2동으로 분동될 때 궁동은 오류동일부지역과 온수동과 함께 오류1동사무소의 관할이 되었다.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 의해 구로구가 영등포구에서 분할신설됨에 따라 자연히 구로구 관할이 되었고, 1988년 7월 1일에구로구조례 제59호(1988년 6월 23일 공포)에 따라 오류 1동에서 궁동과온수동만을 분리하여 다시 수궁동을 설치함에 따라 수궁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궁동이라는 동명은 조선 선조(宣祖)의 일곱째 정선옹주(貞善翁主)가이곳에 살던 길성군(吉城君) 권대임(權大任)에게 출가하여 살던 집이여기에 있었으므로 궁궐 같은 큰집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선옹주가 이곳으로 시집을 오게되자 선조는 이 일대의 땅을사패지(賜牌地)로 하사하였다. 사패(賜牌)란 고려나 조선 때에 왕이왕족이나 공신에게 노비와 땅을 내려주던 것을 말한다. 따라서사패지(賜牌地)는공음전(功蔭田) · 사전(賜田) · 사패전(賜牌田) · 훈전(勳田) 등의이름으로도 불리운다. 이러한 땅은 대부분 세습되었는데, 사패지의넓이에 대해서는 "사방 10리" 또는 "밤에 촛불을 켰을 때 그 불빛이비치는 곳 모두"라고도 하는데 사패지는 주로 경기도에 많았다.

 

정선옹주가 시집간 안동 권씨 집안은 조선 선조 때에 세도가였으며권대임은 글씨를 잘 써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예조판서를 지낸 충정공(忠貞公) 권협(權挾)의손자였던 까닭에 상당한 재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따라서 그들이 사는집은 궁궐처럼 크고 화려했으므로 인근 사람들이 이 마을을궁마을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는 마치 지금 서울의 소공동(小公洞)이태종(太宗)의 둘째 공주인 경정공주(慶貞公主)가 살던 곳이라서 소공주댁이라 부르던 것이 동네 이름이 된 것과 유사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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