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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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혁 및 동명의 유래


오류동은 조선영조 때 부평도호부 오류리로처음 그 이름이 보인다. 1895년 5월 26일에 인천부 부평군 수탄면오류리가 되었다가, 1896년 8월 4일 부평군이 인천부에서 벗어나경기도에 속하게 됨에 따라 자연히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 오류리가되었다. 그 뒤 1914년 3월 1일에 부평군의 관내 행정구역에 면이설치됨에 따라 경기도 부평군 게남면 오류리가 되었다가, 1931년 4월1일에는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오류리로 그 소속이 바뀌었고, 941년10월 1일에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오류리가 되었다.

 

해방 후인 1963년 1월 1일에 법률 제1172호(1962년 11월 21일 공포)에의한 서울특별시 행정구역확장에 따라 시흥군 · 김포군 · 부천군의 12개면90개리를 서울특별시로 편입하였는데, 이 때 오류동도 소사읍 관내6개동과 함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어 서울시의 일부가 되었다.이 때 영등포구에는 김포군 양동면 · 양서면, 부천군 오정면 · 소사읍,시흥군 신동면 · 동면 등 3개군에 걸쳐 많은 지역이 편입되었다.

 

따라서 서울시에서는 이렇게 넓은 신편입지구를 관할하기 위하여 1962년 12월28일자로 공포된 서울특별시 조례 제276호에 의하여 영등포구에신동(新洞) · 관악(冠岳) · 양동(楊東) · 양서(良書) · 오류(梧柳)출장소의5개 출장소를 신설하였다. 오류동은고척동 · 개봉동 · 궁동 · 천왕동 · 항동 · 온수동과 함께 오류출장소관할하에 있었는데, 1968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491조에 의하여망우 · 오류 · 양동 관악출장소가 폐지됨에 따라 오류동은 영등포구의직할로 편입되었다. 이어서 1980년 4월 1일 영등포구의 인구 증가로인해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거하여 영등포구의 남부지역을 분할하여구로구를 신설함에 따라 오류동은 구로구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류동의 행정동의 변천은 1963년 1월에 오류동이 서울시에편입되면서 서울특별시 조례 제275조에 의하여 오류동사무소를설치하였다. 그 후 서울시는 1970년 5월 18일 동행정의 불균형을조정하고자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 「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구역변경 조례」에 의해 56개동을 분할하여 113개동으로 만들고, 119개 동을통합하여 65개동으로 줄였는데, 오류동은 동정(洞政) 여건이 어려운수궁동(온수 · 궁 · 항동)을 통합하여 오류동사무소에서 행정을 담당하게되었다. 당시 오류동의 면적은 9.28㎢에 인구는 29,230명, 가구 수는5,823호로 30개 통과 267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어 1975년 10월1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981조에 의해 동장 정원 및 명칭과 관할 구역의변경이 있었는데, 이 때 오류동은 경인선 철도를 경계로 오류제1동과오류제2동으로 분동(分洞)되었다. 분동된 오류제1동은 3.66㎢의 면적에3,987가구 18,921명이 속했는데, 관할 구역은 오류동 242번지를기점으로 141, 40, 65, 77∼79번지에 연하는 이북 지역과 궁동 및온수동 일원이었다. 그리고 오류제2동은 5.62㎢의 면적에 2,973가구16,471명이 속하게 되었는데 관할 구역은 천왕동, 항동 일원과 오류동중 오류제1동의 관할 구역을 제외한 부분이었다.

 

그 후 1980년 4월 1일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구(分區)됨으로 인해오류동은 구로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하여1988년 7월 1일에 오류제1동에서 온수동과 궁동을 분리하여수궁동(온수동 · 궁동)으로 분동하였다.

 

 

위치 및 연혁


오류동은 현 위치는동쪽으로는 · 개봉동 · 천왕동과 접하며, 서쪽으로는 온수동 및 경인선철도를 경계로 궁동과 접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항동과, 북쪽으로는개봉동과 접하고 있다. 이처럼 오류동은개봉동 · 궁동 · 온수동 · 항동 · 천왕동 등에 둘러싸여 있는 관계로 이 6개동의 중심 역할을 맡고 있다.

 

 

옛지명


오류골

오류동의 동네 이름의 연원이 된 오류골은원래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오류골의 위치는현재 경인로 남쪽변 동부제강 서울제강소(오류동 123번지) 일대이며, 그서쪽은 현재 서울가든빌라 앞 부근이 된다.

 

주막거리

경인로 덕산병원 부근을 옛날에는 덕고개라불렀는데, 이 고개는 경인로 확장과 남부 순환로의 개설로 인해 이 두도로가 교차하는 오류 인터체인지로 변했다. 개봉 · 고척 지역에서 이고개를 넘어 오류동과 인천으로 가는 유일한 고개로 대보름에는이곳에서 불놀이를 하였다고 하며, 부근의 마을을 덕고개 마을이라부른다.

 

안오류골

가린열은 고척동과 경계가 되는 개봉동의중앙에 위치한 곳으로 갈대가 많고 여울이 많은 곳이라 하여 가린여울또는 가린열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칡과 같이 여러 갈래의개천 즉 개봉천 · 오류천 · 개웅천이 안양천과 합수되어 여울이 많다 하여갈탄(葛灘)이라 하였다 한다. 이곳은 갈대가 많고 넓은 습지였던 곳으로수리조합이 있었는데, 지금의 개봉배수펌프장이 있는 곳으로 옛날 물을조절하던 수리조합의 펌프장이었다. 가린열은 아래의 부누꿀과 광주물을포함하는 지역이었다.

 

가린열

가린열은 고척동과 경계가 되는 개봉동의중앙에 위치한 곳으로 갈대가 많고 여울이 많은 곳이라 하여 가린여울또는 가린열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칡과 같이 여러 갈래의개천 즉 개봉천 · 오류천 · 개웅천이 안양천과 합수되어 여울이 많다 하여갈탄(葛灘)이라 하였다 한다. 이곳은 갈대가 많고 넓은 습지였던 곳으로수리조합이 있었는데, 지금의 개봉배수펌프장이 있는 곳으로 옛날 물을조절하던 수리조합의 펌프장이었다. 가린열은 아래의 부누꿀과 광주물을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보롱메(보름외)

부누꿀은 가린열 북쪽마을로 지금의성아단지 아래쪽 개봉노인정과 개봉1동 새마을금고지역으로, 옛날에는이 지역이 구릉지로 자두밭이었는데 매립하여 성아단지를 조성하였다. 뒷산인 가녈봉(일명 갈탄봉)을 부누꿀 뒤쪽에 있는 산이라고 하여부누꿀산이라고도 불렀다.

 

응골(엉꿀)

가린열 여울이 지금의 청실아파트,미주빌라, 개봉역 주변에서는 광주리에 물을 퍼담는 형상과 같이 되므로광주물이라 불렀다고 한다. 혹은 이 지역에 물이 많이 모인 까닭에 넓은연못이란 뜻에서 광지(廣池)라고 한 것이 변하여 광지물 또는 광주물이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가린열, 광주물은 여울과 관련이 있는동네로 물과 인연이 깊은 동네이며, 마을의 형성 이후 경인로가 확장개설되어 주택가보다 길이 높았으므로, 안양천의 역수로 여름철이면곧잘 침수를 당하곤 하였다. 이러한 수해를 막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투입하여 개봉빗물펌프장을 확장 신설하여 수방대책에 만전을 기하고있다.

 

버들이 마을

가린열 여울이 지금의 청실아파트,미주빌라, 개봉역 주변에서는 광주리에 물을 퍼담는 형상과 같이 되므로광주물이라 불렀다고 한다. 혹은 이 지역에 물이 많이 모인 까닭에 넓은연못이란 뜻에서 광지(廣池)라고 한 것이 변하여 광지물 또는 광주물이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가린열, 광주물은 여울과 관련이 있는동네로 물과 인연이 깊은 동네이며, 마을의 형성 이후 경인로가 확장개설되어 주택가보다 길이 높았으므로, 안양천의 역수로 여름철이면곧잘 침수를 당하곤 하였다. 이러한 수해를 막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투입하여 개봉빗물펌프장을 확장 신설하여 수방대책에 만전을 기하고있다.

 

텃골

하나님의 교회 신학교 뒷산인 학산은개웅산과 매봉을 잇는 중간에 있는 얕은 능선이라고 볼 수 있는자은산으로 좌우로 경인선 철도와 남부순환로, 경인로가 동서로횡단하는 주요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은 6 · 25동란 당시에수도권 지역이 북괴에 점령당하였을 때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성공으로 인천과 부천을 탈환한 UN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해 올 때 인천과수도서울을 잇는 중요한 병참보급로였으며 기계화부대의 유일한 통로구실를 하였다. 이곳에서 북괴군은 최후 저지선을 구축하고 끝까지저항하였으나 UN군은 이를 어렵게 격멸하고 영등포 노량진을 넘어서울을 장악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학산을 점령하면서울로 가는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고 시야가 한 눈에 들어오는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 이 산은 예비군 전술훈련장으로사용되다가 남부순환로가 개통되면서 따로 떨어진 섬과 같은 작은산으로 남아 있다.

 


명물 및 명소


유순정 묘

고척동에는 옛날에 바위가 울었다 하여우렁바위 또는 명암(鳴岩)이라고도 하고 길마바위라고도 하는 바위가있다. 양천구 목동과의 경계 지점에 있는 이 바위의 모습이 마치 감투나사모처럼 생겨 감투바위, 사모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옆에는말안장 처럼 생겨 안장바위 또는 의자 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다. 바위는 그리 크지 않으나 높은 산이 없는 이 지역에서는 그 중 큰바위에 속하는 것이다. 지금은 이 바위들을 목동아파트 단지 물탱크가있는 곳으로 옮겨놓았으나, 1988년까지만하더라도매년 10월 초하루에는이 바위에서 동네의 번영과 평안을 축원하는 도당제(都堂祭)를 지냈다고한다. 부근에 약수터가 있어 주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바가지우물

영등포교도소와 영등포구치소가 인접한고척동 103-4번지에는 청계천 주변에 밀집해 있던 기계공구상가를외곽지역에 분산한다는 시책 아래 기계공구상가들이 이전해 왔다. 고척공구상가라 명명된 이곳은 건물 3동으로 이루어져 각종산업용품들의 도소매가 이루어지고 있다. 전기 · 전자용품 등의 부속품과각종기계용품을 판매하는 이곳에서는 1990년초부터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시장 상가 건물의 옥상을 주차장으로 개방함으로써 주차난해소에도 한몫을 하고 있으며, 공구상가가 들어서면서부터 번화해진고척동은 경인로와 경인전철이 지나가고 있어 한적했던 이곳이 이전과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번잡해졌다. 이로 인해 공구상가의 주변에는많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동의 면모를 일신시키고 있다.

 

동정 성모 수도회

구로구의 유일한 대학인동양공업전문대학(東洋工業專門大學)은 고척교를 건너 안양천변의고척동 62번지 160에 자리잡고 있다. 1939년 4월 1일 동양공과학원으로설립되어 공업기술인 양성을 시작하였다가, 1965년 동양공과전문학교로바뀌면서 보다 전문적인 공업인을 육성하다가 1974년 2월에동양공업전문학교로 개편하여 대학교육을 시작하였다. 1980년에공업전문대학으로 승격된 이 학교는 효성그룹이 재단으로 되어 있으며 졸업생들은 특히 전자 · 전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1953년 5월 19일에 설립한 동양공업고등학교가 노량진에서 이전하여같은 캠퍼스 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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